“오늘은 네가 좀 달라 보여.”
현우의 말에 세림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날도 있지, 뭐.”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세림은 오전 내내 손끝이 떨렸다. 내과병원으로 응급환자가 들어왔고, 세림은 자신도 모르게 환자 보호자의 이름표를 오래 바라봤다.
“김주현”, 그 이름은 그녀가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그림자였다.
3년 전. 그는 세림의 전 연인이었다. 짧지만 강했던 사랑, 그리고 갑작스럽게 무너진 신뢰.
그가 의료사고로 환자의 정보를 조작했던 사실을 알고, 세림은 그를 신고했다.
그 일은 은밀히 마무리됐고, 세림은 그 병원을 그만뒀다. 하지만, 세상은 조용하지 않았다. “일 키운 간호사”라는 오해 속에서, 그녀는 낯선 도시로 도망치듯 내려왔고, 현우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날 밤, 현우는 세림이 남긴 메모를 읽었다.
“혹시라도 날 멀리하게 될까 봐, 그동안 말하지 못했어.”
처음으로, 현우는 그녀의 눈빛이 왜 그렇게 깊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늘 밝게 웃지만, 그 안에는 늘 누군가를 경계하는 모습이 숨어 있었다.
다음 날, 현우는 그녀를 찾아갔다. 세림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그의 눈빛에 말을 잃었다.
“나도 병원에서 무기력했던 적 있었어. 사랑하는 고양이를 수술하다 죽게 만들고…
그 보호자한테 내가 살인자라는 소리도 들었고.”
현우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세림아, 넌 그 일에 책임을 졌고, 옳은 선택을 했어.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해. 그 사람의 그림자까지 안고 사랑할 수 있어.”
세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누군가의 진심은, 결국 마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시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날 밤, 세림은 처음으로 현우의 품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는 말없이 등을 토닥였고, 이따금 고양이 ‘콩이’가 발치에 와서 조용히 웅크렸다.
봄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이번엔, 단단한 뿌리를 가진 사랑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