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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야네 살림수첩
어머니와 사랑방 신사 본문
어머니는 올해로 여든을 넘기셨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밭일을 나서시며, 아침마다 묵은 된장에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밥상을 차리시는 분이다.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강해 자식들에게 신세 지는 걸 몹시 싫어하신다. “나는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늘 입에 달고 사셨다.
그런 어머니가 달라진 건, 지난 겨울 동네 경로당이 리모델링되면서 ‘사랑방’이 생기고부터다. 동네 노인들이 바둑도 두고, 손뜨개도 하고, 책도 읽을 수 있는 작은 쉼터였다.
도시락도 제공하고, 종종 건강 검진도 와주는 그곳은 어르신들에게는 작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어머니는 처음엔 "쓸데없는 짓"이라며 가시지 않았지만, 이웃 할머니들의 권유로 한번 나갔다 오신 후로는 매일 오전 10시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녀오셨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꽃무늬 조끼를 꺼내 입으시고, 입술에도 살짝 색을 얹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어디 아프신가’ 걱정도 했지만, 조심스레 여쭈어 보니 어머니는 아무 일 아니라며 슬쩍 웃으셨다.
하지만 며칠 뒤, 동네 아주머니가 귓속말로 알려주셨다.
“영희 어머니 말야… 요즘 사랑방 신사랑 꽤 다정하더라고.”
사랑방 신사라니?
그의 본명은 ‘한춘식 어르신’이었고, 일찍이 부인을 여의고 자식들도 외국에 나가 혼자 사시는 분이었다. 키가 크고 곧았으며, 바둑을 두거나 시를 읊는 것을 좋아하는 낭만적인 성품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의 매력은 말이었다. 조곤조곤, 예의 바르고 정감 넘치는 말씨로 사람을 참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리 앉으세요, 김 여사님. 오늘은 국화차를 드릴까요?”
“어머, 고맙습니다. 오늘은 손이 좀 시리네요.”
어머니는 그렇게 매일 그와 사랑방에서 차를 나누고,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셨다.
봄이면 진달래 이야기를, 여름이면 소쩍새 소리를, 가을이면 첫사랑 얘기를, 겨울이면 그리움을 나누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네셨다.
“이거, 너희 아버지 사진이랑 편지인데, 네가 가져가.”
“왜 갑자기요?”
“이제는 좀 놓아주려 한다. 평생 곁에 있어주지 못한 사람이지만,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어머니의 눈빛 속에서 오래도록 묻어 있던 쓸쓸함이 이제는 조금 사라졌음을.
며칠 뒤, 나는 몰래 사랑방에 들렀다. 유리창 너머로 어머니가 신사와 마주 앉아 웃고 계셨다.
한 손엔 따뜻한 차를 들고, 다른 한 손엔 그의 시집을 펼쳐두고 있었다.
“<노년의 사랑>이란 시 아세요?”
그가 물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나이 들어 사랑이라니… 우습죠?”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이 들수록 사랑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겁니다. 젊을 땐 불꽃이지만, 늙어서는 잔잔한 온기지요.”
그날 저녁,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사랑이란 게 꼭 함께 살고, 이름을 붙이고, 약속을 해야만 성립되는 건 아니더라. 그냥 누군가와 매일 눈을 마주치고, 말동무가 되어주고, 서로가 사라졌을 때 허전함이 느껴진다면… 그게 사랑이지 뭐겠니.”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오래전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였던 어머니에게도 다시 꽃이 피려는 걸까.
그 후, 어머니와 신사는 동네 소풍도 함께 다녀오고, 작은 글 모임도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신사의 손글씨를 보며 “요즘 남자들은 저런 글씨체 못 써” 하시며 흐뭇해하셨고, 그는 어머니에게 보름달이 예쁘다며 시 한 구절을 적어주곤 했다.
“그대의 눈동자에 비친 보름달,
나는 거기서 젊은 날의 봄을 본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은 두 분을 ‘우리 마을 커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줍어하시던 어머니도 이젠 그 별명을 피식 웃으며 받아들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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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더 이상 매일 아버지를 추억하며 눈시울을 붉히지 않으셨고, 새벽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대신, 머리를 곱게 말리고, 옷을 고르며 하루를 기대하신다. 나날이 생기가 도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 역시 안심이 되었다.
어느 봄날, 나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다시 사랑하는 게… 두렵진 않으세요?”
어머니는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벚꽃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처음엔 그랬지. 내가 이런 마음 가져도 되나 싶었어.
하지만 말이야, 인생이란 게 마지막까지 살아볼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춘식 씨와 차를 마시며 웃을 수 있다면, 그거면 됐어.”
나는 그 순간, 어머니가 단지 ‘어머니’가 아닌 한 사람의 여성으로, 인생의 주인공으로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은 나이 들었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기쁨이자, 두근거림이었다고
“영희 엄마 요즘 신이 났더라. 사랑방 신사한테 꽃 선물도 받았대.”
“신사요?”
“응. 한춘식 어르신. 당신 또래쯤 될 거야. 키도 크고, 예전엔 국어 교사였대. 글도 잘 쓰고, 말도 곱게 하니까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지.”
나는 반신반의했다. 우리 어머니가, 남자와 사랑이라니?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투가, 눈빛이, 얼굴빛이 변하고 있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어느 날, 나는 일부러 평일 오전 시간을 비우고 사랑방 근처를 찾았다.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창가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옆에는 한 분의 신사가 다소곳이 앉아 어머니에게 차를 따르고 있었다. 회색 카디건에 단정한 머리, 곱게 정리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말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꽃이 더 활짝 피었네요, 김 여사님 얼굴 말입니다.”
어머니는 웃음을 참으시며 찻잔을 들어 올리셨다.
“어머, 입에 발린 말 하시긴.”
두 분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혹은 오랫동안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아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이면서, 한편으론 가슴이 먹먹했다.
다음 날, 어머니는 나를 부르셨다.
“이거 좀 봐라.”
어머니가 내민 것은 작은 손편지 한 장이었다. 정갈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김 여사님.
당신의 미소는 내 하루의 시작을 꽃피우고,
당신의 침묵은 내 고요한 밤의 등불입니다.
우리가 인생 끝자락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 다행입니다.”
나는 말을 잃었다.
“춘식 씨가 줬다. 생강차에 곁들여서.”
어머니는 편지를 품에 고이 접으며 말했다.
사람이 말이야, 젊을 땐 사랑이 불같아야 한다고들 하지. 하지만 나이 들면… 그냥 눈빛 하나, 찻잔 하나에도 가슴이 뭉클하더라.”
나는 그제야 어머니가 ‘여든셋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춘식 어르신은 매주 어머니에게 시를 한 편씩 적어다 주셨다. 때론 윤동주였고, 때론 자작시였다. 어머니는 그 시를 작은 노트에 옮겨 적고, 옆에 자신의 짧은 감상을 써넣으셨다. 그리고 그걸 책상 옆에 놓고 밤마다 조용히 읽으셨다.
“이거, 사랑일까?”
어머니가 물으셨다.
나는 대답 대신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사랑은 꼭 결혼이나 약속 같은 걸로 정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서로 생각나고, 그리워지고, 하루를 기다리는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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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났다. 사랑방에서는 작은 여행 모임이 생겼고, 어머니와 춘식 어르신은 함께 꽃구경을 다녀오셨다. 두 분이 찍은 사진 속에는 수줍은 미소가 가득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춘식 씨가 말하더라. 자신이 먼저 떠나게 되면, 내게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말라고.”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 나이 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란 걸 알잖니. 하지만 난 괜찮아. 이렇게라도 다시 가슴 뛰어본 게 어디야. 세상에 사랑이란 게 남아있다는 걸 알았는걸.”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가슴에 새겼다.
가을이 왔다. 사랑방엔 국화가 피고, 창문 너머로 단풍이 물들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매일 같은 시간에 모자를 쓰고 그곳으로 향하신다.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사랑을 나누며. 어쩌면 그 하루하루가 가장 귀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사랑방 신사의 사랑은 조용했다. 시끄러운 감정도, 눈물 섞인 갈등도 없었다. 그저 눈을 마주하고, 찻잔을 건네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 세상에 꼭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사랑도 있다.
결혼이나 가족이 아니어도, 함께 늙어가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내 어머니는 지금, 가장 빛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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