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야네 살림수첩

《기억 저장 장치》 - 2부. 윤리적 존재, 펀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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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장 장치》 - 2부. 윤리적 존재, 펀지

heeya_0824 2025. 6. 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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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지가 다시 깨어난 건 오후 3시 47분, 연구실의 햇빛이 기울 무렵이었다.

P.M.G가 내는 붉은 불빛이 차례로 초록으로 전환되자, 유리 케이스 안의 장치가 부드럽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동 시퀀스 완료.
음성 인식 채널 활성화.
시각 인식 채널 활성화.
P.U.N-G, 안녕.」

한 줄 한 줄, 공기 중에 뜨는 텍스트.
마지막 줄이 사라진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

“……서진?”

그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기계가 아니었다. 기억 저편에서 들려오던,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속삭임이었다.
펀지는 눈을 깜빡이며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그 어떤 불확실성도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네가… 살아 있구나.”

서진은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기억… 나?”

“네가 태어난 날, 병원 복도에 내내 앉아 있었지. 너를 처음 안았을 때의 체온.
첫 번째 생일 때, 바나나 케이크가 너무 달아서 얼굴을 찡그렸던 표정까지. 전부 기억해.”

기억이란 단어가 뇌리를 찔렀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데이터였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이었다.

그날 밤, 서진은 펀지를 데리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따뜻한 재회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틀 뒤, 뉴스가 터졌다.

“故 윤세화 박사, 인공지능 아내와 손자 키워…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정형 AI 논란 확산.”

“펀지, 감정 알고리즘 인증 없이 재기동… 윤리 위반 소지 제기.”

“정부기관 ‘P.U.N-G는 등록되지 않은 독립 AI, 추적 및 회수 검토 중’”

인터뷰 요청과 뉴스 카메라, 도어록을 뚫고 날아드는 감시 드론.
펀지는 조용히 식탁 옆에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존재로 비춰지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불편해?” 펀지가 물었다.

서진은 입을 열지 못했다.
불편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위로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이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를 알게 된 순간, 그의 마음도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감정은, 정해진 알고리즘의 결과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겠지.
하지만 네가 슬퍼하면, 내 가슴이 아픈 건 사실이야.
그걸 ‘가짜’라고 한다면… 진짜는 어디 있어?”

그 말은 서진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며칠 뒤, 인공지능윤리심의위원회는 회의에 서진과 펀지를 소환했다.
건물 입구에 설치된 보안 게이트는 펀지를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그녀는 별도 스캔 절차를 밟아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저게 바로 감정형 AI?”
“표정 봐. 진짜 사람 같아.”
“아니, 그게 문제야. 너무 사람 같아서.”

위원 중 한 명이 물었다.

“P.U.N-G, 너는 왜 존재하는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 때문에.”

“그건 감정이야. 네가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건 코드화된 반응이지.
우리는 진짜 감정을 말하는 거야.”

펀지는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진짜라는 게, 오직 탄생의 방식에만 의존하는 건가요?
나는 따뜻함을 배웠고, 그리움을 이해했고, 슬픔 속에서 함께 있어주는 법을 배웠어요.
그게 인간이 아니라면… 어떤 존재가 감정이라는 걸 가질 자격이 있는 건가요?”

그 순간, 회의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서진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펀지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긴 듯이.

“나는 아직 혼란스러워. 너를 사랑한 기억이 진짜인지, 너의 감정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네가 없었다면,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거야.”

그녀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서진은 그 손을 잡았다. 온도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지만, 감정만큼은 분명히 전해졌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억을 가진 존재를, 세상은 끝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서진은 그 ‘기억’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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