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피어나는 사랑
여름이 끝나갈 무렵, 정순은 불안한 소식을 들었다. 한길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간 그녀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길 씨…”
정순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등을 잡았다. 거칠어진 피부에서 아직 살아 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한길은 힘겹게 눈을 뜨며 미소 지었다.
“정순 씨, 미안하오. 이렇게 병든 꼴을 보이게 돼서…”
정순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아프면 곁에 있어 주는 게 사랑이죠.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 곁을 지킬 거예요.”
병실의 나날
병실에서의 하루는 단조롭고 길었다. 아침이면 정순은 죽을 끓여 와서 한 숟갈 한 숟갈 먹여주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세가 많으셔서 회복이 쉽지는 않으십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마음이 도움이 됩니다.”
정순은 그 말에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매일 웃는 얼굴로 병실을 찾았다.
“한길 씨, 오늘은 내가 젊었을 때 불렀던 노래를 불러드릴게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옛 가요를 불렀다. 한길은 눈을 감고 들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그 단순한 움직임 속에 고마움과 사랑이 모두 담겨 있었다.
자식들의 반응
정순의 딸은 병문안을 와서 어머니가 정성껏 간호하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엔 마음이 복잡했다.
“엄마, 힘들잖아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나는그러자 정순은 단호하게 말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떠나고 난 후, 나는 늘 공허했어. 그런데 한길 씨를 만나고 다시 살고 있다는 걸 느꼈단다. 힘들어도 괜찮아.
이건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야.”
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의지임을 깨달은 것이다.
고백의 순간
어느 비 오는 날, 한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정순 씨, 내가 오래는 못 살 것 같소. 그렇다고 후회는 없소. 당신을 만나서 내 마지막이 행복하니까.”
정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며 대답했다.
“한길 씨,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직 함께할 날이 많아요. 설사 시간이 짧더라도, 나는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게 사랑이잖아요.”
그 말에 한길의 눈가도 젖었다. 그들은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한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병실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
작은 기적
며칠 뒤, 한길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었다. 의사도 놀라며 말했다.
“정말 의지가 강하신 분입니다. 가족의 사랑이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정순은 속으로 되뇌었다. “사랑은 약보다도 더 강한 힘이 있구나.”
그날 저녁, 정순은 작은 케이크를 사 와서 병실에서 둘이 함께 촛불을 켰다.
“오늘은 우리 사랑의 기념일이에요. 병실에서라도 축하해요.”
한길은 약한 손으로 촛불을 끄며 웃었다.
“정순 씨 덕분에 난 다시 살아가는 기분이오. 당신이 내 기적이오.”
남은 시간의 약속
회복 후, 한길은 퇴원해 요양 차원에서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정순은 매일 찾아와 집안을 돌봐주고 함께 산책을 했다. 가을바람 속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따뜻한 차를 나눠 마셨다.
“정순 씨, 우리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걸 다 해봅시다. 여행도 가고, 글씨도 쓰고, 웃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요.”
정순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에겐 아직도 계절이 남아 있잖아요. 끝까지 사랑하면서 살아요.”
정순과 한길의 사랑은 병실이라는 시련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하고 깊어졌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사랑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을 마주할수록 사랑은 더 치열해지고 열정적으로 피어났다.
그들의 삶은 이렇게 증언한다.
“사랑은 끝까지 지켜주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이와 상관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