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한껏 부드럽게 내려앉은 공원 벤치. 하얀 머리칼을 단정히 묶은 **정순 할머니(78세)**는 손에 작은 꽃다발을 쥔 채,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설렘이 이렇게나 뜨겁고 벅찬 것인 줄, 평생을 살아온 그도 새삼 놀라고 있었다.
정순은 평생을 성실한 아내, 엄마, 그리고 할머니로 살아왔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익숙함 속에 인생을 보냈다.
남편과는 정 많은 부부였지만 열정적인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10년을 보내면서, 이제는 그저 조용히 늙어가리라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노인복지관의 서예 모임에서 **한길 어르신(80세)**을 만났다. 늘 정갈한 한복 차림에, 글씨를 쓰는 손끝이 섬세하고 곧은 그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순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나무라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설레임이람….”
하지만 그 마음은 거짓일 수 없었다. 한길 또한 정순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내곤 했다. 복지관 마당에서 차를 마시다 눈이 마주칠 때면,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불꽃처럼 다시 타오른 감정
어느 날, 서예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비가 쏟아졌다. 한길은 우산을 펼치며 정순에게 다가와 말했다.
“같이 가십시다. 이 비 맞으면 감기 드실라.”
비 오는 길을 나란히 걷는 순간, 정순은 세상이 다시 젊어진 듯 느껴졌다. 빗소리 속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나란히 맞춰지고, 말없이 걸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매일 같이 만나 복지관 앞 커피숍에서 차를 마셨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젊은 날 못다 한 꿈, 자식들 이야기, 인생의 외로움,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재의 감정들.
정순은 어느 날 용기 내어 말했다.
“선생님, 제가 요즘 자꾸 젊어지는 기분이에요.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게 오랜만이라서요.”
한길은 웃으며 대답했다.
“정순 씨, 나도 그렇소. 나이 여든이 뭐가 중요하겠소. 마음은 아직 청춘이잖소.”
가족들의 시선과 갈등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정순의 딸은 어머니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 사랑한다는 사실을 듣고 당황스러워했다.
“엄마, 이 나이에 무슨 연애예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면 되지, 왜 굳이 사랑이라고 말하세요?”
정순은 딸의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오래 참아온 마음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딸에게 담담히 말했다.
“얘야, 사랑이 나이를 묻니? 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그저 살아낸 거야. 그런데 지금은 살아 있는 기분이야. 나에게도 다시 설레고 싶은 권리가 있지 않니?”
딸은 쉽게 수긍하지 못했지만, 정순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한 것을 보고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열정의 계절을 살다 정순과 한길은 함께 여행도 다녔다. 남해 바닷가를 걸으며 손을 잡고, 젊은 연인처럼 사진을 찍었다. 해가 질 무렵, 붉게 물든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정순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라도 괜찮다. 지금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
한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예 붓글씨로 정순의 이름을 쓰며 말했다.
“내가 평생 써온 글씨 중에 제일 떨리는 이름이오. 정순 씨, 당신은 내 남은 생의 봄이오.”
사랑에는 끝이 없다
사람들은 흔히 노인의 사랑을 ‘노인네들의 치기 어린 감정’이라며 가볍게 여긴다. 하지만 정순과 한길의 사랑은 그 누구보다 뜨겁고 진실했다. 젊음이 지나갔다고 해서 사랑의 불꽃까지 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월의 무게가 그 사랑을 더 깊고 뜨겁게 만들었다.
정순은 어느 날 손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랑은 나이를 묻지 않는단다. 네가 할머니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니? 지금도 내 마음은 두근거린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면서도, 할머니의 미소 속에서 사랑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정순과 한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은 몇 살까지 가능할까?
그들의 대답은 분명했다.
“사랑은 끝이 없다. 살아 있는 한, 심장이 뛰는 한, 우리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이를 넘어선,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가장 열정적인 불꽃이었다.